콜럼버스보다 500년 먼저 신대륙을 발견한 바이킹 레이프 에이릭손
유럽 탐험사에서 콜럼버스가 유럽인 최초로 1492년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약 500년 전, 유럽에서 신대륙에 도달한 이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북유럽의 용맹한 항해자들, 바이킹 레이프 에이릭손입니다.
바이킹과 대서양 항해 그리고 신대륙
바이킹은 8세기부터 11세기까지 북유럽을 중심으로 활동한 민족이었습니다. 그들은 뛰어난 조선술과 항해 기술을 갖추고 있었으며,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시작해 유럽, 북아프리카, 아시아 일부 지역까지 항해했습니다. 특히, 바이킹들은 롱십이라는 가볍고 빠른 배를 사용하여 먼 바다를 항해할 수 있었습니다. 바이킹의 신대륙 탐험은 아이슬란드를 경유하여 그린란드로 이어졌고, 결국 아메리카 대륙까지 도달하는 대서양 횡단의 여정을 완성했습니다.
레이프 에이릭손 유럽인 최초로 신대륙 발견하다
10세기 후반, 에이리크 힌 라우디는 아이슬란드에서 추방당한 후 새로운 정착지를 찾아 나섰고, 그린란드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린란드를 푸른 땅이라고 불러 이주민들을 유치하려 했고, 성공적으로 정착지를 세웠습니다. 이후 아들 레이프 에이릭손이 뒤를 이어 더욱 먼 곳으로 항해를 떠나게 됩니다.
레이프 에릭손은 그린란드를 떠나 서쪽으로 항해하던 중 새로운 땅에 도착했습니다. 이곳을 빈란드라고 명명을 했습니다. 빈란드의 정확한 위치는 오랜 논쟁의 대상이었지만, 오늘날 캐나다의 뉴펀들랜드 지역이 유력한 후보지로 꼽힙니다. 1960년대, 노르웨이 탐험가 헬게 잉스타드와 아내 앤 스타인 잉스타드는 뉴펀들랜드의 랑스 오 메도즈에서 바이킹 유적지를 발견하며 이를 뒷받침하는 중요한 증거를 제공하였습니다.
바이킹 정착의 한계와 철수
바이킹들이 빈란드에 정착하려 했던 시도는 오래 지속되지 못했습니다.
첫째로 원주민들과의 갈등이 있었으며, 북아메리카 원주민들과의 충돌이 발생하면서 정착이 어려워졌습니다.
둘째로, 그린란드와의 보급로 유지가 어려웠습니다. 빈란드는 그린란드보다도 더 먼 곳에 위치했기 때문에 물자 공급과 인구 유지가 힘들었습니다.
셋째로, 기후 변화로 인해 바이킹들의 원래 거주지였던 그린란드조차도 생존이 어려워지는 상황이 발생하면서 빈란드 정착을 지속하기 어려웠습니다.
결국 바이킹들은 빈란드를 떠나 다시 그린란드로 돌아갔고, 이후 그린란드의 바이킹 사회도 점점 쇠퇴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바이킹들의 신대륙 개척은 유럽 사회에서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결론
바이킹들의 아메리카 대륙 탐험은 콜럼버스보다 약 500년 앞선 위대한 업적이었지만, 정착의 어려움으로 인해 지속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레이프 에이릭손의 항해는 유럽인의 대서양 횡단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비록 당시 유럽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지만, 20세기 이후 고고학적 발견을 통해 바이킹들의 신대륙 개척이 사실로 밝혀지며 재조명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