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리튼 섬의 변화, 앵글로색슨과 바이킹의 침략
로마가 브리튼에서 철수하면서 로마의 강력한 통제력과 질서가 사라지면서 브리튼은 정치적 혼란과 외부 세력의 침입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에는 여러 민족이 브리튼으로 들어와 자신들의 영역을 넓혀갔으며, 그중 앵글로색슨인과 바이킹이 대표적입니다. 이들은 브리튼의 문화와 역사를 근본적으로 바꾼 세력으로, 각자의 방식으로 정착하고 전쟁과 동맹을 통해 영토와 권력을 다투었습니다.
앵글로색슨의 정착과 브리튼의 재구성
로마가 철수한 후 브리튼은 혼란기에 접어들었습니다.
이때, 유럽 대륙의 게르만계 부족인 앵글족, 색슨족, 주트족 등이 브리튼으로 이주해 오면서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들은 5세기경부터 브리튼 남동부 해안을 중심으로 서서히 정착하기 시작했고,
기존의 켈트족과 충돌하며 세력을 확장해 나갔습니다.
앵글로색슨인들은 점차 브리튼 전역에 걸쳐 왕국을 세웠고, 웨식스, 머시아, 노섬브리아 등 주요 왕국들이 형성되었습니다.
앵글로색슨 사회는 부족 공동체를 기반으로 한 농업 중심의 사회였으며,
초기에는 중앙 권력이 강하지 않고 각 지역마다 작은 왕국들이 자치를 이루는 형태였습니다.
그들의 종교는 처음에는 다신교였으나, 6세기 후반부터 기독교가 전파되면서 변화를 맞이했습니다.
이는 앵글로색슨 왕국들이 문화적 통합을 이루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앵글로색슨 사회와 문화의 형성
앵글로색슨 왕국들은 각각 독립적인 통치 체제를 갖추었고, 왕국마다 고유의 전통과 법을 지키며 자치적으로 운영되었습니다.
초기 앵글로색슨 사회는 농업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급자족하는 농민이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들은 브리튼섬의 농경과 목축, 무역을 중심으로 경제 활동을 발전시켰고, 이에 따라 각 왕국의 정치적, 경제적 힘도 커졌습니다.
또한 앵글로색슨족은 기존 켈트족과는 다른 독자적인 언어와 문화, 법률 체계를 형성했습니다.
그들은 켈트족의 영향을 받긴 했지만, 자신들만의 전통과 신화, 예술 양식을 만들어냈으며,
주로 구전으로 전해지는 서사시와 신화를 통해 문화적 정체성을 구축했습니다.
이들은 후대에 앵글로색슨어로 불리는 독자적인 언어를 사용했으며, 이 언어는 훗날 고대 영어의 기초가 됩니다.
바이킹의 첫 침입과 영향
8세기 후반, 앵글로색슨 왕국이 어느 정도 안정기에 접어들었을 무렵, 새로운 침입자가 등장했습니다.
바로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온 바이킹들입니다. 바이킹은 오늘날의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지역에서 온 해양 민족으로,
전사적 성향과 해양 기술이 뛰어나 넓은 영역으로 원정을 떠났습니다.
793년 노섬브리아 왕국의 린디스판 수도원이 바이킹에게 약탈당한 사건은 영국 역사에서
첫 번째 바이킹 침입으로 기록되었으며, 이 사건 이후로 바이킹은 지속적으로 브리튼섬을 공격하고 약탈하기 시작했습니다.
바이킹은 주로 여름철에 해안가를 급습해 약탈을 벌였으며, 이들은 금과 은, 곡물 등 값진 자원을 노리고 브리튼섬의
수도원과 마을을 반복적으로 습격했습니다. 바이킹의 빠른 속도와 잔혹한 공격 방식은
앵글로색슨 왕국들에게 큰 공포로 다가왔고, 각 왕국은 바이킹의 침입에 대응하기 위해 군사력을 재정비하게 되었습니다.
바이킹의 정착과 데인로의 성립
9세기에 이르러 일부 바이킹은 단순한 약탈을 넘어 브리튼섬에 정착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주로 브리튼섬 동부와 북부 지역에 정착지를 형성하였고, 점차 앵글로색슨 왕국과의 충돌이 빈번해졌습니다. 865년, 덴마크에서 대규모 바이킹 군대가 브리튼섬에 상륙하면서 본격적인 영토 점령을 시도했고, 이를 통해 데인로라 불리는 바이킹의 지배 지역이 형성되었습니다. 데인로는 동부 앵글리아, 노섬브리아 남부, 머시아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으로, 바이킹이 자신들의 법과 관습을 유지하며 통치하는 구역이었습니다. 이 지역에 정착한 바이킹들은 토착민들과 혼합되어 살아가며 경제적, 문화적 교류를 이루었습니다. 데인로 지역에서는 스칸디나비아식 농업과 무역이 발전했고, 바이킹의 언어와 관습, 법이 앵글로색슨 사회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특히 오늘날 영국어에 남아 있는 많은 단어들이 바로 이 시기 바이킹의 언어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앨프레드 대왕과 앵글로색슨의 반격
9세기 후반에 이르러, 웨식스의 앨프레드 대왕은 바이킹의 위협에 맞서 브리튼의 통일을 꾀하게 됩니다. 앨프레드 대왕은 바이킹과의 전투에서 전략적인 승리를 거두며 브리튼 남부와 중부를 안정시키고, 웨식스 왕국을 중심으로 앵글로색슨의 세력을 다시 강화했습니다. 앨프레드 대왕은 878년에 에딩턴 전투에서 바이킹을 물리치고 화평 조약을 맺으며, 데인로와 웨식스 간의 경계를 확립했습니다. 앨프레드 대왕은 바이킹과의 협상을 통해 평화를 유지하며 방어 체계를 강화하고, 국내의 법률과 교육을 정비하여 앵글로색슨 사회를 재건하려 했으며, 성벽을 재건하고 요새를 건설하여 방어를 강화했으며, 교육과 학문을 장려하였습니다.
바이킹과 앵글로색슨의 융합
10세기에 이르러 바이킹과 앵글로색슨인들은 계속해서 전쟁과 평화를 반복했으나,
점차 문화적으로 융합되어갔습니다. 바이킹은 브리튼 섬에 정착하면서 농업과 무역에 종사하게 되었고,
점차 앵글로색슨 사회에 동화되어 갔습니다. 두 문화는 언어, 법률, 사회 체계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새로운 형태의 브리튼 사회를 형성했습니다.
현대 영어에는 앵글로색슨과 바이킹의 언어가 섞여 있으며,이들은 법률과 정치 체계에서도 상호 영향을 끼쳤습니다.
또한, 바이킹 출신의 군주들이 앵글로색슨 왕국을 통치하게 되는 경우도 생겼습니다.
대표적으로 덴마크의 크누트 대왕이 1016년에 브리튼을 정복하여 왕으로 즉위하게 되면서,
바이킹의 통치 하에 새로운 정치 체제가 수립되었습니다.
결론
로마의 철수 후, 브리튼은 앵글로색슨과 바이킹의 침입으로 큰 변화를 겪었습니다. 앵글로색슨은 브리튼 전역에 왕국을 세우고, 바이킹은 정착하여 문화적 영향을 미쳤습니다. 앨프레드 대왕은 바이킹의 침입을 막고 국가를 재건했으며, 두 문화는 융합되어 브리튼 사회를 새롭게 형성했습니다. 이 과정은 오늘날 영국의 역사와 문화에 깊은 영향을 끼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