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황제의 해, 로마 제국의 불안정과 세베루스 왕조의 등장
로마 역사에서 다섯 황제의 해로 불리는 서기 193년 단 한 해 동안 다섯 명의 황제가 차례로 즉위한 비극적인 해입니다. 이 사건은 로마 제국의 권력 구조가 극심한 불안정에 빠져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로, 제국의 미래에 큰 영향을 미친 시기로도 평가됩니다. 황제의 자리가 짧은 시간에 여러 차례 바뀌면서 발생한 혼란과 갈등은 로마 제국 내부의 권력 분쟁을 여실히 드러냈습니다.
혼란의 시작, 콤모두스의 죽음과 제국의 불안정
다섯 황제의 해의 서막은 로마 황제 콤모두스의 암살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콤모두스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아들로, 로마 제국을 통치한 황제였지만 무자비하고 사치스러운 생활로 악명 높았습니다. 치세는 로마의 쇠락과 혼란을 가속화했으며, 결국 192년 12월 31일 그의 친위대에 의해 암살되면서 제국은 후계자 없이 권력의 공백 상태에 빠졌습니다. 이는 곧 로마 내부의 다양한 세력들이 권력을 잡기 위해 경쟁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페르티낙스, 첫 번째 황제
당시 로마 황제였던 코모두스가 암살당하자, 원로원은 서둘러 차기 황제로 퍼티낙스를 지목했습니다. 퍼티낙스는 검소하고 청렴한 인물로 알려졌으며, 황제가 되자마자 개혁 정책을 추진했습니다. 국고의 재정을 회복하고, 이전 황제의 사치스러운 생활을 자제하는 등 강력한 개혁을 시행했습니다. 그러나 정책들은 근위대등 기득권층의 반발을 불러왔고, 즉위한 지 불과 3개월 만에 근위대에 의해 살해당하고 말았습니다.
디디우스 율리아누스, 돈으로 황제의 자리를 사다
퍼티낙스의 죽음 이후, 로마의 군사력 중심이었던 근위대는 황제 자리를 경매에 부쳤습니다. 이때 부유한 귀족이었던 디디우스 율리아누스가 황제 자리를 사기 위해 막대한 금액을 지불하며 권력을 손에 넣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이 로마 시민들과 군인들에게 황제 자리가 경매 대상이 된 사실이 알려지며 율리아누스에 대한 반감이 급속히 확산되었습니다. 제위는 불과 2개월 만에 끝이 났으며, 민심과 군대의 지지를 얻지 못해 결국 처형당하고 말았습니다.
페스케니우스 니게르
동방 지역의 군대 사령관이었던 페스케니우스 니게르는 디디우스 율리아누스에 대한 반감을 이용해 황제로 선언되었습니다. 주로 동부 속주에서 강력한 지지를 얻었으며, 로마의 정치적 불안정을 자신의 기회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세력은 서방 지역의 세력을 결집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에 의해 무너지고 맙니다.
클로디우스 알비누스
서방의 영국 지역을 중심으로 영향력을 행사했던 클로디우스 알비누스 역시 자신을 황제로 선언했습니다. 일시적으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와 동맹을 맺었지만, 나중에 갈등을 빚게 됩니다. 결국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와의 전투에서 패배해 목숨을 잃고, 세력도 점차 소멸했습니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세베루스 왕조를 세우다
최종적으로 황제로서 권력을 확립한 인물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였습니다. 로마 제국의 동부와 서부에서 모두 강력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경쟁자들을 차례로 제거하며 권력을 장악했습니다. 세베루스는 친위대를 개혁하고, 군대에 대한 재정 지원을 강화해 자신의 지지 기반을 다졌습니다. 이후 치세는 로마 제국의 새로운 국면을 여는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결론
서기 193년은 로마 제국 역사에서 극적인 혼란의 시기로 기록됩니다. 다섯 황제의 해로 불리는 이 시기는 콤모두스의 암살로 시작된 권력의 공백과 뒤이은 권력 투쟁이 어떻게 제국 전역에 영향을 미쳤는지 보여줍니다. 연이은 황제의 즉위와 몰락, 근위대의 권력 남용, 군사령관들의 내전은 로마 제국의 불안정성을 여실히 드러내며 제국의 쇠퇴를 가속화했습니다. 그러나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최종적으로 황제 자리에 오르면서 세베루스 왕조가 시작되었습니다.